정각재

AI가 답하는 시대, 인간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정각재 2026. 9. 11.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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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가 되면서 오히려 철학과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처음에는 조금 의외였다. AI가 발전하면 컴퓨터공학이나 데이터처럼 기술과 직접 관련된 분야가 더 주목받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AI가 많은 답을 대신 만들어주는 시대가 되자, 인간에게 필요한 질문과 판단을 다루는 철학이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AI를 잘 사용하려면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것일까?

 

 

AI가 만들어준 배경

 

나도 몇 달 동안 AI를 업무에 도입해 자료조사, 글 정리, 아이디어 탐색 등 여러 분야에 활용하고 있다.

확실히 AI는 좋은 배경을 빠르게 만들어준다. 처음 접하는 주제의 개념을 정리하고, 흩어진 자료를 비교하며, 글의 기본 구조까지 만들어준다. 혼자 시작했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작업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방향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편리해진 만큼 달라진 습관도 있다.

 

AI가 정리한 내용을 받으면 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보다 필요한 부분만 훑고 넘어갈 때가 있다. 많은 정보를 얻었다는 느낌은 들지만, 그 내용을 정말 이해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정보를 많이 받은 것과 실제로 이해한 것은 같은가?

 

AI는 지식에 접근하는 비용을 낮춰준다. 동시에 내가 이미 이해했다는 착각에 도달하는 비용도 낮출 수 있다.

 

 

AI가 말을 잘 알아들을수록

 

나는 말하기와 쓰기를 비롯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언어적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AI를 사용했을 때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프롬프트를 구체적으로 작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AI가 발전하면서 이제는 생각을 대충 툭툭 던져도 의도를 파악해 꽤 그럴듯한 결과를 만들어준다.

 

편리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글도 점점 대충 작성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모든 프롬프트를 길고 정밀하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장이 거친 것과 생각이 모호한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짧고 서툴게 말하더라도 목적과 문제의식이 분명할 수 있다.

 

반대로 문장을 길게 작성해도 무엇을 알고 싶은지 모호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장의 길이가 아니라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이다.

  • 내가 해결하려는 문제는 무엇인가?
  • 왜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 어떤 기준으로 결과를 판단할 것인가?
  • 그 판단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고 싶은가?

AI가 불완전한 문장을 보완해줄 수는 있지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목적까지 대신 정해줄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보이는 글과 타당한 판단

 

앞으로 논리적인 형태의 글을 쓰는 일은 AI가 인간보다 훨씬 잘하는 분야가 될 수도 있다.

AI는 글의 순서를 정리하고, 주장과 근거를 배치하며,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연결하는 데 능숙하다.

방대한 정보를 탐색하고 여러 관점을 빠르게 조합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이는 글과 실제로 타당한 판단은 같지 않다.

AI가 제시한 전제가 사실인지, 중요한 이해관계자가 빠지지 않았는지, 그 결론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사람이 다시 살펴야 한다. 많이 반복된 의견을 일반적인 진실처럼 제시하거나, 서로 다른 자료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도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다.

 

결국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AI보다 문장을 잘 만드는 능력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경험과 지식을 새로운 정보와 연결하고,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며, 여러 선택지 가운데 어떤 결과가 더 나은지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철학과가 AI 시대에 유리할까

 

 

철학의 어원인 philosophia는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이 의미에서 보면 AI 시대에 철학이 다시 주목받는다는 말은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AI가 많은 정보를 제공할수록 그 정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AI를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철학과의 지원자가 늘었다고 하더라도 그 원인이 모두 AI 시대의 사고력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입시 구조나 대학 진학 전략처럼 다른 원인이 함께 작용할 수 있다.

 

또한 AI 도구에 능숙하다고 해서 논리와 사고가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AI를 잘 다루는 기술과 자신의 사고를 키우는 일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같은 능력은 아니다. 학문과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많이 얻는 일이 아니라, 어떤 원인과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세상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겠다는 태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절약한 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샘 올트먼은 AI로 인해 개인이 실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의 범위가 크게 넓어지고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말을 AI로 작은 결과물을 빠르게 만드는 데 만족하지 말고, 과거에는 능력과 시간이 부족해 시도하지 못했던 더 큰 문제에 도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바이브코딩으로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어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경험이다. 다만 AI가 코드를 써주고,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정리해주는 데서 끝난다면 우리는 절약한 시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AI가 반복적인 작업을 대신한다면 인간은 더 적게 생각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인지 찾고, 어떤 결과가 더 좋은지 판단하며, 그 선택이 다른 사람과 사회에 미칠 영향을 살펴야 한다. AI가 넓혀준 가능성을 실제 가치로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경쟁자가 아니라 더 큰 문제를 위한 동반자

 

 

AI와 인간의 능력은 경쟁 관계일까, 아니면 보완 관계일까?

자료조사, 요약, 번역, 초안 작성처럼 결과물을 생산하는 영역에서는 분명 경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질문하고, 어떤 근거를 받아들이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영역에서는 AI가 인간의 사고를 확장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

 

반대로 판단까지 AI에게 맡긴다면 AI는 사고를 확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고를 약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AI 시대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AI보다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하거나 더 매끄러운 글을 쓰는 능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볼 것인지, 어떤 결과가 더 좋은지, 그리고 그 선택에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판단하는 능력.

 

 

AI가 우리의 시간을 절약해준다면 그 시간을 덜 생각하는 데 쓰고 싶지는 않다.

 

AI를 협력자이자 동반자로 삼아, 이전보다 더 큰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다. AI가 답을 만드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 과정을 하나씩 기록하고 다듬어가는 것이 앞으로 정각재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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